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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탄부호’가 아깝지 않다…불교성지 양양 낙산사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⑳ 천년고찰 낙산사
671년 의상대사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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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번 방문지는 강원도 양양에 있는 낙산사입니다.
양양 낙산사의 상징, 해수관음상. 높이만 16m 달한다.

‘해 돋는 광경은 양양 낙산사가 으뜸이요. 해 지는 모습은 변산 앞바다가 제일’이라고 했다.

낙산사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동해 해돋이는 장엄하여 황홀경에 빠지게 하고 홍련암은 세계 8대 관음성지의 한 곳으로 신비로운 정서를 자아낸다. 고은 시인은 망망대해 동해와 파도 속에 둘러싸여 오랜 세월을 보낸 낙산사를 두고 감탄 부호를 붙여서 ‘동해 낙산사!’라고 불러야 한다며 칭송했다.

강화 보문사, 남해 보리암과 함께 3대 관음기도도량으로 손꼽히고 관동팔경(關東八景)에 포함되는 유명 관광지여서 수학여행 학생들의 단골 방문지인 낙산사는 2005년 강원도를 덮친 대산불로 소실되어 전 국민을 안타깝게 했다.

조선시대 김홍도가 남긴 ‘낙산사도’에 입각해 2007년 전면 복원된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를 다녀왔다.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
산불로 소실된 낙산사의 복원사업이 대부분 끝난 2009년 6월 하늘에서 찍은 전경 [연합]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인 낙산사는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671년 의상대사가 세웠다. 절 창건에 얽힌 설화가 내려온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원도로 향했다. 오봉산 동쪽 벼랑에서 7일 동안 기도를 올리자 용왕의 시종들이 굴속으로 인도했다. 대사를 만난 용왕이 그에게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었다. 다시 7일을 기도하자 관음보살이 나타나 “낙산 정상자리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전각을 지어라”고 했다. 의상대사는 그 말대로 전각을 짓고 관음보살상을 조성하니 대나무가 없어졌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낙산사 원통보전(圓通寶殿)자리라고 한다. 기도했던 절벽 석굴은 관음굴이고 그 위에 터를 닦고 암자를 세운 것이 홍련암이다. 오봉산은 그 지형이 관세음보살이 머물렀던 인도의 보타낙가산(補陀落迦山)과 비슷하여 낙산이라 이름 붙이고, 절 이름도 낙산사라고 했다.

관음굴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굴이다. 굴 안에 용(龍)이 사는데 용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덕분에 기도도량으로서 많은 불자들이 찾는다. 홍련암 바닥에 관음굴을 볼 수 있는 10cm 크기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거기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용은 보이지 않고 절벽과 석굴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만이 넘실거렸다. 홍련암은 2005년 산불 당시 건물 바로 앞에서 불길 방향이 바뀌며 화마를 피했고 덕분에 더욱 유명해졌다.

홍련암 바닥에 뚫린 작은 창. 관음굴을 내려다볼 수 있다.

낙산사의 경우 창건 설화부터 관세음보살과 관련이 있는 까닭에 대웅전 대신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원통보전이 절의 중심 역할을 한다. 관세음보살을 원통대사(圓通大師)라고 지칭해서다.

원통보전은 2005년 낙산사 화재 때 전체가 소실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고 내부에 있는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1372호)은 불이 번지기 전에 옮겨놔 화를 면했다. 고려시대 양식의 아름다운 관음좌상으로, 6·25전쟁 이후 사찰을 복구하면서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靈穴寺)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복원된 원통보전과 칠층석탑
보타전. 관음상 1500좌가 놓여 있는 건물이다.

비교적 근래에 지어진 보타전은 관음상 1500좌를 봉안하고 있다. 낙산사가 대표적인 관음성지임을 상징하는 웅장한 건물이다.

홍련암, 의상대와 함께 낙산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인 해수관음상은 절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 잡은 높이 16m의 거대한 관음불상이다. 1977년 완성 당시 동양 최대의 불상으로 기록됐다. 불상의 정면 조금 아래에는 관음전이 있는데 통창이 나 있어 그곳으로 외부의 해수관음을 보며 기도를 올릴 수 있다.

홍련암, 원통보전, 보타전, 해수관음상,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등 절 전체가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것을 목적으로 구성됐다. 먼 옛날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도 “이곳이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이라 했다고 한다. 덕분에 지금까지 대표적인 관음 기도처로 여겨진다.

1000년 넘게 이어온 낙산사의 유산
의상대. 의상대사가 이 부근에 앉아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탁 트인 동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의상대는 1926년 만들어졌다. 당시 낙산사에 머물고 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이 낙산의 일출을 바라볼 정자 하나 없는 것이 아쉬워 지금의 건물을 짓고 의상대라 하였다. 이곳은 의상대사의 좌선 수행처로 알려져 있으며 다행히 2005년 화재 피해를 면한 의상대 옆 낙락장송은 여전히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겸재 정선은 의상대에 올라 동해의 장엄한 일출을 보고 ‘낙산일출(洛山日出)’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수평선에서 바다를 뚫고 떠오를 새빨갛고 둥근 태양을 기대하며 아침 일찍 의상대에 올랐으나 두꺼운 구름층이 태양을 붙잡고 놔 주질 않는다. 기다리던 인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자 그제야 구름 속을 뚫고 잠시 얼굴을 내밀더니 이내 숨어 버렸다. 그 조차 감사할 따름이다.

조선 세조가 친히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홍예문이 실질적인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다.

무지개 형태의 석문 ‘홍예’ 위에는 1962년에 세운 문루가 있었는데 화재 때 소실됐다. 홍예문을 지나면 좌측엔 기념식수한 소나무들이 줄지어 있고, 우측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의 ‘낙산배 시조목’이라는 비(碑)와 함께 배나무 한 그루가 ‘낙산배’의 명성을 드러내고 있다.

홍예문
사천왕문. 2005년 강원도 산불의 피해를 비껴간 건물 가운데 하나다.

낙산사 사천왕문은 한국전쟁과 2005년 강원도 산불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사천왕상 앞 큰 벚나무 두 그루가 산불을 막아 피해를 면했다고 한다. 악귀를 몰아내는 사천왕이 다른 전각들도 지켰어야지 스스로만 지켰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원통보전 근처에 자리잡은 7층석탑은 독특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보물이다. 원래는 3층이었지만 탑을 중수하면서 층수를 늘렸다는데 전쟁을 겪으면서 한쪽 귀퉁이가 잘려나갔다.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얻어왔다는 수정염주와 여의주가 석탑 속에 있다고 한다.

세조 때 만들어진 원통보전을 둘러싼 별무늬 담장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받아 문화재로 등록되었으나 화재로 일부가 소실되어 남아있는 부분들을 토대로 복원했다. 독특하면서 고전미가 있다.

낙산사의 별무늬 담장. 미적인 가치가 높은 유산이다.

여름이 되면 연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관음상이 세워진 연못 ‘관음지’ 안의 포대화상 주변에는 방문자들이 소원을 빌며 던진 동전이 가득 쌓여 있다. 화재에 휩쓸려 흉측하게 녹아버린 보물 동종과 의상대사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의상 기념관’과 절 초입에 설치해 둔 낙산사 산불재난안전 체험장도 둘러봄직하다. 화재 당시의 사진들과 불타버린 범종루를 형상화한 모형, 그리고 불타버린 기와를 활용해 천지인 3개의 상징탑을 조성해 둔 곳은 어쩐지 찾는 이가 별로 없어 보인다.

동해를 맞이한다는 ‘빈일루’, 관음지를 감상할 수 있는 ‘보타락’은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2층 누각으로 누구나 무료로 커피나 음료를 마실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사찰 풍광을 넋놓고 즐기며 머리를 비워봤다.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높은 위치의 해수관음상 앞 전망대에서는 설악산과 대포항, 낙산해변 등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다. 관음상 주위를 느긋하게 돌아보니 무산대종사의 부도탑도 볼 수 있었다.

“밤 늦도록 책을 보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혼자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무산 조오현의 ‘파도’)

낙산사 일대는 예로부터 많은 화가와 문인들이 영감을 얻던 곳이다. 겸재 정선, 서암 김유성, 단원 김홍도 등이 그림을 그렸고 허균도 낙산사에 관한 시 3편을 남겼다. 그 외에도 수많은 고전과 시문(詩文)이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도 의상과 원효 이야기뿐만 아니라 드라마틱한 ‘조신의 꿈’ 이야기, 범일국사가 정취보살을 모시는 이야기 등 낙산사를 배경으로 한 많은 설화들이 등장한다.

의상대사의 정신과 원효대사의 사상
낙산사 홍련암

의상과 원효 두 대사와 낙산사에 얽힌 설화는 이렇다. 원효는 8년 연하의 후배 승려 의상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도량 낙산사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가는 길에 흰옷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어 희롱삼아 벼를 달라 하니 흉작이라 했다. 또 길을 가다 다리 밑에 빨래하던 여인이 있어 물을 청하니 더러운 물을 퍼서 주었다. 원효는 그 물을 버리고 냇물을 떠서 마셨는데, 파랑새 한 마리가 “원효법사 그만 두시오” 하고 신발 한 짝을 남기고 홀연히 날아가 버렸다. 낙산사 관음상 아래에 이르니 같은 신발 한 짝이 있어 그제야 앞서 만난 여인이 관음의 진신(眞身)임을 깨달았다. 석굴에 들어가 다시 관음의 참모습을 보고자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갈 수 없어 그만 떠났다고 한다.

의상대사와 달리 관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수정염주도 받지 못하는 봉변을 당한 원효대사는 남해 금산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절을 창건했는데 바로 남해 금산 보리암이다.

원효대사는 617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원효-의상 두 사람은 두 번의 당나라 유학길을 함께 떠날 정도로 가까웠다. 650년 당나라 유학 가는 길에 고구려 국경수비대에게 첩자로 의심받아 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10여년 뒤 원효가 두 번째 당나라 유학길을 떠나다가 서해안 한 무덤가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달게 마셨는데 다음날 깨어나 보니 해골에 담긴 더러운 물인 걸 알고 토했다. 여기서 원효는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며 깨달음을 얻고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의상은 원래대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지엄대사로부터 화엄종을 공부하고 유학 중 당나라 침공을 알리기 위해 귀국해 통일신라시대 화엄종을 전파했다.

일본 교토에 있는 고잔지에 전해내려오는 원효대사(왼쪽)와 의상대사의 초상화

의상은 거대한 불교 체계 속에 들어와야 깨우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신라화엄종을 정립하고 교단 중심의 미타 정토신앙을 통해 불교대중화를 전개했다. 당시 의상을 금산보개(부처의 몸)의 화신이라 하며 신격화하였고 가야산 해인사.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사. 비슬산 옥천사. 태백산의 부석사 등 열 곳의 사찰을 개창하여 화엄교리를 전했다.

반면 원효는 극락왕생의 정토사상을 서민들의 마음속에 심어주고자 왕실과 귀족 중심 불교를 서민대중의 불교로 바꾸고자 했다. 요석궁 공주와 만나 설총을 낳음으로 세속의 옷으로 갈아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라 칭하며 여러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읊으며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도 경전을 읽지 않고 불교의 교리에 통달하지 않아도 나무아미타불만 염송하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불교 대중화를 도모했다. 2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쓰며 원효사상의 핵심인 화쟁(和爭, 다툼을 화해시킨다)사상을 정립했다.

이처럼 원효와 의상은 신라불교의 큰 기둥이다. 덕분에 전국 어디를 가든 두 사람이 창건했다는 절이 많다.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하여 대중화가 필요한 시기에는 원효의 사상이 필요했으나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지배층에게 유리한 의상 같은 체계 질서가 필요해서 원효의 사상을 약화시키고 의상을 신격화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삼국유사의 낙산사 창건 설화에서 의상과 원효의 비교가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낙산사의 눈물
새벽에 바라본 해수관음상

몽골제국의 침략(고려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조선시대), 현대에 이르러선 6·25전쟁 등으로 낙산사는 네번 소실됐다. 전쟁 직후인 1953년 다시 지어졌으나 2005년 4월 강원도 일대를 덮친 큰 산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또 소실됐다.

이 화재로 보물인 낙산사 동종이 녹아내려 그 잔해는 기념관으로 옮겨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타고 남은 대들보로 제작한 바이올린도 전시되고 있다.

대대적인 복원사업을 거쳐 낙산사는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복원 과정에서 형태가 바뀐 전각이 있다. 특히 산불의 피해를 피하려고 불에 강한 나무를 심고 바람 길을 뚫는 등 화재에 충실히 대비했다. 홍예문을 지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복원을 기념해 심은 소나무들이 그때의 아픔을 덜어내고 있다.

2005년 4월 강원도 산불이 강풍을 타고 낙산사로 번져 범종각이 불에 타고 있다 [연합]
멀리서 바라본 해수관음상과 홍련암

낙산사는 규모가 큰 절이고 동해를 끼고 있어 항상 사랑받는 관동지방 여행의 필수 코스다. 주변 숙박처는 방문자들로 가득 차서 북적거렸다. 낙산사는 종교의 벽을 넘어 시민과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다. 절이 보유한 수십만 평의 토지를 파크골프장, 명상센터 등 주민과 관광객을 위한 공간으로 제공해 지역 관광 활성화에도 기여하려 한다.

낙산사로 들어가는 문은 큰길 쪽에 있는 일주문이 아니라 대형 유료주차장 쪽에 있는 ‘관음성지 낙산사’라는 현판이 걸린 산문(山門)을 주로 이용한다. 지척에 낙산해수욕장도 있어 주차장 앞 500m 정도 큰길에는 낙산시외버스터미널이 있고 동서울터미널 등 각지로 이어지는 버스편이 있다. 동서울까진 평일 가준 2시간 10여분 정도 소요된다. 수학여행 시즌이면 학생들을 가득 태운 관광버스들이 몰려오고 여름철이면 피서객들로 북적일 것이다. 설악산, 동해 해변, 대관령 양떼목장 등 강원도의 유명관광지를 찾는 이들에겐 여전히 낙산사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절의 아픈 기억도 점점 옅어지길 바란다.

글·사진 = ㈜헤럴드 정용식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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