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샤넬’과 ‘에코주의’를 매치한 중산층의 욕망

박송이 기자

망해가는 시대…쥐·귀신으로 변해버린 인간

모두가 최대치의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김사과 작가 ⓒ남궁선

김사과 작가 ⓒ남궁선

하이라이프

김사과 지음 |창비 |268쪽 |1만5000원

폼페이는 갑작스럽게 화산이 폭발하면서 한 순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진 도시는 오랜 세월 동안 화산재에 파묻힌 채로 있었기에, 멸망 직전까지 평소처럼 일상을 살았던 고대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렇게 종말 직전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으스스하면서도 쓸쓸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김사과의 소설집 <하이라이프>(창비)도 그렇다. 마찬가지로 종말 직전의 세계를 들여다본다는 점에서다. 소설집에 수록된 9개의 작품은 망가진 도시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일그러진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들은 구체적으로 멸망을 예고하고 있지는 않지만, 망가진 도시는 필연적으로 멸망을 향해 가는 듯 보인다. 작품이 보여주는 위태로운 징후들은 종말 이후의 존재에 의해 그려진 것처럼 예리하고 섬뜩하다.

‘서문-비행기와 택시를 위한 문학’과 ‘귀신들’은 상징적으로 읽히는 난해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한 채 망해가면서 ‘쥐’가 되었다가 종래에는 ‘귀신’이 된다. ‘서문-비행기와 택시를 위한 문학’에서 인간은 쥐가 되어 고통스러은 “황금 철창을 사랑”하는 동시에 “도시에 완전히 중독”된 존재로 나온다. 자본주의 교환원리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 (쥐가 된) 현대인들은 장소를 상실한 채 비행기나 택시에 몸을 싣고 언제나 이동 중이다. 모든 것들은 “맥락 없이 지나가는 풍경”에 불과하고, 삶이란 그저 “도시와의 교환행위” 정도로 축소됐다.

여기서 인간은 ‘쥐’에 그치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귀신’으로 변모한다. 연작소설처럼 이어지는 두 번째 작품 ‘귀신들’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들을 잡아먹는 ‘귀신’ 혹은 ‘홀로그램’이 되거나 그것들이 될 수 없다면 피를 빨아먹고 민폐를 끼치는 ‘흡혈귀’가 된다. 작가는 전작 <0 영 ZERO 零>에서 현대사회를 타인을 먼저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식인’의 세계관으로 조명한 바 있다. ‘귀신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꼬집는다.

책 <하이라이프>.  창비

책 <하이라이프>. 창비

‘두 정원 이야기’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 두 작품은 현실의 세계와 현대인들의 심리를 사실적으로 밀착 조명한 작품이다. 타인을 밟고 더 위로 올라가려는 중산층의 욕망과 허위의식을 다룬다.

‘두 정원 이야기’에는 완벽한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김은영과 윤은영이 나온다. ‘절약의 화신’ 김은영은 치열한 청약 경쟁을 뚫고 “준강남 지역”이라고 불리는 D구의 H아파트에 입주한다. “중산층을 위한 청년왕국”이라고 불리는 이 아파트 상가에는 모든 물건 가격이 “사악한” 고급 슈퍼마켓이 있다. 김은영의 아침 루틴은 H아파트 입주민에 걸맞게 “밋밋하면서도 우아하게” 차려입고 고급 슈퍼마켓을 둘러본 후 빈손으로 나와 마을버스를 타고 할인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는 절약과 라이프스타일 두 가지 모두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복잡한 고난도의 게임에 참여”하게 된 것을 흡족하게 즐긴다.

그런 김은영 앞에 ‘소비의 화신’ 윤은영이 나타나면서 만족도는 급감한다. 김은영은 줄곧 윤은영이 경제적으로 곤란해지기를 기대했지만, 윤은영 또한 H아파트 입주민이 돼 재회한 것이다. 게다가 윤은영은 단숨에 H아파트 입주민의 아이콘이 돼버린다. “올 샤넬”로 치장한 윤은영은 “파타고니아의 합성섬유 점퍼와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실크 브라우스를 감각있게 매치”하며 ‘에코주의’를 자신의 핵심가치로 내세우는 “가장 세련된 2020년대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김은영은 내심 윤은영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하지만, 김은영의 욕망 또한 윤은영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윤은영을 향한 김은영의 불만은 중산층 라이프스타일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식을 통해 해소된다.

자식을 통한 물질적·문화적 자본의 대물림과 중산층의 구별짓기 욕망은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에서 엿볼 수 있다. 이수영과 한비는 대학교 신입생 때 만나 친구가 된다. 물질적·문화적 자본이 부족해 부모님으로부터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다고 내심 불만을 품고 살던 이수영은 묘하게 위화감이 느껴지는 한비와 친해지면서 단숨에 그에게 빠져든다. 한비는 그 나이 또래와 달리 커피, 와인, 위스키에 대한 취향이 분명했고, 음악, 미술, 문학, 철학과 패션, 예술과 인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수영의 주위에는 그녀의 부모를 포함하여 자신처럼 적당한 불만족 속에서, 적당한 망상과 적당한 현실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한 채 살아가는 인간들로 그득했다. 한편 한비의 주위에는 그녀의 부모를 포함하여 어딘가 황당한 꿈을 품고 둥둥 떠서 살아가는 비현실적인 인간들로 가득했다.”

그렇게 20대를 한비에게 빠져 살아갔던 이수영은 서른 살 한비의 결혼식에서 “그녀가 청춘을 바쳐 선망한 신비한 생명체의 창조자”를 맞딱드리게 된다. 한비의 부모였다. “한비의 어머니는 누구보다 세련되게 와인잔을 쥘 수 있었으며 아버지는 교양 있는 유학파 명문대 교수처럼 보였는데 실제로 그랬다.” 또한 한비의 두살터울 남동생은 전문직이었고 그의 여자친구는 강남의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였다. 이수영은 “한비가 보내는 유혹의 신호, 그 모호하게 열렬한, 자연스럽지만 필사적인, 그리하여 굉장히 그로테스크해지는 그녀의 구애가 다름 아닌 자신의 부모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비의 과감함, 여유, 매력 등의 총체가 그의 부모가 수십년간 깎아 만든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건 계급의 차이가 만들어낸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책은 모든 것을 욕망하고 타인을 짓누르는 현대사회를 신랄하게 조명한다. 그러나 이같은 삶의 양태는는 멸망 이후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소유의 종말’은 2025년 세계가 멸망한 후,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소유라는 개념조차 사라지고 현실에서는 기본소득을 받으며 모두 똑같이 5.5평의 임대주택에 살아가고 있지만, 가상현실은 위기 직전이었던 2024년 현실과 유사하게 세팅되어 있다. 결코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 곳에서 모두가 행복한 현실을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그때의 방식으로 말이다. 마음껏 돈을 벌고 무한정 소비하고 아무렇게나 사랑에 빠지는 삶을.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사악하고, 폭력적인, 고통으로 가득한 과거 멍청한 인간들의 삶을 말이다. 모두가 최대치의 욕망을 향해 광기 어린 포즈로 다가가던 바로 그 때의 사람들처럼, 스스럼없이 스스로의 야만성을 극대화하는 데 온 인생을 바치던 미개한 개인들의 삶을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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